사실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이 상황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알베르 까뮈 <La peste> 중

책이나 드라마, 영화 속에서만 등장 하는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비현실적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까뮈는 무덤에서 얼마나 호쾌한 웃음을 지을까?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이 양반들아! 겪어보니 어때?")

전 인류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세상이 일시정지 되었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번 재앙은 전세계인 모두가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이다.
슬픔도 나누면 반이 된다 했으니
함께 헤쳐나가고 서로 양보하며 까뮈의 시나리오대로 '만인을 위한 방식'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스페인 독감을 통해 각성한 인류는 까뮈의 <페스트>도 학습했고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전>도 감상했다.
어차피 영화처럼 코로나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이번 대재앙을 통해 사적인 모임도 취소되고, 일거리도 끊겼지만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그동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의 일상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24시간이 모자란다는 유행가처럼 재앙에 앞섰던 하루들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멈춰버린 일상들이 얼마나 느리게 나를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지루할 정도로 조용한 이 국면이
혼돈과 무질서, 인연과 우연, 행운과 불행 등의 가치들을
점검 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 마냥 느껴졌다.
어쩌면 빠른 일상 속에서는 얻지 못할 진리와 정답을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행복과 불행은 50대 50의 확률게임이다.
행복만 계속되는 사람이 있으면 불행만 계속되는 사람도 있다.
오늘 소개할 영화 두편은 모두 불행만 계속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한 편은 쾌속질주로 빠르게 전개되고
다른 한 편은 슬로우모션보다 느리게 그 불행에 다가간다.
우리는 보통 빠르게 다가오는 물체들...
(예컨대 내 앞으로 분노의 질주를 해오는 자동차라든가 브레이크 고장난 기차)
을 보고 공포를 느끼지만 오늘의 영화들이 시사하는 바는 정반대이다.
느린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또 빠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아담 샌들러는 영화 <언컷젬스>에서 뉴욕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는 하워드로 분한다.
하워드는 보석상이지만 온갖 채무들로 가난하며 스포츠도박에 중독되어 있는 한심한 작자이다.
설상가상으로 보석상에서 함께 일하는 점원 줄리아(줄리아 폭스 분)와는 불륜 사이이기도 하다.
이러한 하워드를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는 시종일관 정신없이 그의 일상을 쫓고
편집도 촬영스타일에 맞춰 정신없이 빠르게 컷팅 되어진다.
하워드는 시종일관 아내를 포함한 주변인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결정적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갱스터를 가드로 고용한 채권자 앞에서도 서슴치 않는다.
이쯤 되면 자신의 지난 날을 반성하고 성실하게 마음을 다잡을 만도 한데
하워드는 자신의 불행에 굴하지 않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제목과도 일맥상통하는 '오팔 원석'에 관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도박의 내막은 이렇다.
1년 반에 가까운 시간동안 공을 들여 오팔 원석을 수입한 하워드는
그 원석의 기묘한 에너지에 기대어 시합을 이기려는 NBA 농구스타 케빈 가넷에게 판다.
(원래는 빌려주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팔게된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케빈 가넷에게 받은 원석값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었는데
갱스터를 대동한 채권자에게 빚을 갚지 않고
캐빈 가넷이 몇 득점으로 몇 개의 리바운드를 통해
그의 팀이 이기는 지 예측하여 돈을 따는 스포츠 도박에 올인 해버린 것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행위였냐면 이번에 갚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릴 기세로 갱스터가 협박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몰래 돈을 빼돌려 베팅을 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스포츠 도박에서 돈을 잃으면
빚도 갚지 못하고 목숨도 잃고 어쩌면 딸린 처자식과 애인까지도 위험에 처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또 그와중에 하워드는 자신의 보석상 출입구가 망가진 것을 이용하여
채권자와 갱스터를 외부 출입문과 내부 출입문 사이에 가두어 놓고
도박의 승패를 알수 있는 케빈 가넷의 NBA 중계를 틀어놓고 농락까지 한다.
(하워드와 갱스터 사이에는 투명한 방탄유리가 놓여져 있었기에 갱스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워드가 빼돌린 돈을 들고 튀어
하워드가 시키는 대로 케빈 가넷에게 올인한 줄리아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다.
하워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하워드 앞에는 총을 들고 갇힌 갱스터까지 있었다.
하워드의 스포츠 도박이 예상대로 전개된다면 하워드는 빚을 갚고도 한참 돈이 남아 인생역전이 된다.
만약 결과가 반대라면 하워드는 빚도 갚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될 상황이다.
불행이 반복되고 습관이 된 하워드에게 과연 행운이 찾아올까?
아니면 끝내 하워드의 인생에는 불행만이 지속될까?
결론은 영화를 통해 찾길 바란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국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주연으로
또, 영화 <레이디 맥베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플로렌스 퓨가 열연한 영화 <미드소마>는
<언컷젬스>와는 정반대로
느릿느릿한 편집과 굼뜬 촬영으로 미드소마 축제가 열리는 스웨덴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대니는 송일곤 감독의 단편영화 <소풍>의 한 장면처럼
자동차 배기가스를 실내로 연결한 장치로 죽은 일가족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다. 그녀의 동생이 실제로 벌인 자살의 한 장면이었다.
그늘진 과거로 우울증과 분리불안에 시달리고 있던 마당에
일가족 자살사건까지 덮친 대니는 천애고아가 되어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지다 못해 바닥으로 추락해버린다.
그런 대니에게 친구 펠레는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며 위로를 건네고
자신의 고향동네에 가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오자며 스웨덴으로 친구들을 안내한다.
행복과 불행은 50대 50의 확률게임이라 했다.
행복이 계속되는 사람이 있다면 불행이 계속되는 사람도 있다.
<언컷젬스> 하워드의 불행이 자신의 잘못된 신념과 습관에 있었다면
<미드소마> 대니의 불행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불운하게도 불행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대니가 잃어버린 것.
그러니까 '가족' ,'행복' 등의 테마로 점철된 펠레의 고향 사람들은
미드소마 축제를 통해 이웃간에도 피를 나눈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니를 괴롭히는 것.
그러니까 '죽음', '공포' 등을 눈 앞에서 시연하며
그것은 삶의 연장선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한다.
대니가 '결핍'의 결정체라면,
펠레와 고향식구들, 미드소마 축제와 그 일원들은 '과잉'의 결정체였다.
미드소마 축제가 열리는 호르가의 여정은 시작부터 환각이었다.
축제의 길목에서 만난 펠레의 사촌이 대니와 친구들에게 대마초를 권하고
마음이 어둡고 무거웠던 대니는 시작부터 환각에 빠져 무장해제를 한다.
현실과 환상이 뒤엉키고 하늘과 땅이 거꾸로 도치된다.
그렇지만 영화의 호흡은 결코 빨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천천히 대니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서서히 마주한다.
영화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으로 일관한다.
딸의 의지로 인해 타살 당한 대니의 부모들과는 다르게
호르가의 노인들은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대니는 죽음은 아프고 슬픈것이라 여기지만
호르가 사람들은 죽음은 아름다운 생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대니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지만
호르가 사람들에게 개인이라는 것은 없고 오로지 집단과 연대만이 존재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대니의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과 호르가의 일원인 마야의 섹스씬이다.
크리스티안은 발가벗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야와 섹스를 한다.
마야는 그와 섹스를 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털을 그가 먹는 파이에 넣었고
생리혈을 그가 마시는 주스에 넣어 그를 끌어당긴다.
섹스를 위한 섹스라기 보다는 번식을 위한 섹스에 가까운 행위였다.
호르가 사람들은 외부인을 끌어들여 임신을 한다고 귀뜸했기 때문이다.
대니는 크리스티안의 섹스를 두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실의에 빠져 통곡을 한다.
스웨덴 호르가로 오기 전 대니가 화장실에 숨어 혼자 울었다면
이제는 그 슬픔을 호르가 사람들이 함께했다.
성가대가 합창하듯 대니를 둘러싼 호르가 여자들이 함께 울부짖는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신천지 종교인들 때문에 생긴 건 아니지만
그들의 안일한 공중도덕의식과 잘못된 집단 무의식 때문에
대구 경북 일대를 넘어 전국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확산시키고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다.
이만희라는 무능한 인간이 예수의 재림이라고 믿는 허무맹랑한 종교에 그들이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것은
(더불어 세월호 사건으로 유명해진 유병언/문선명의 통일교/안상홍 증인회/정명석의 JMS 까지...)
그들이 무지하고 저능하거나 저속해서가 아니라
대니처럼 잃어버린 것들을 '종교'라는 집단 속에서 찾게 된 것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종교의 교리를 세뇌시키는 것은 끔찍한 공포이며
집단의 평화를 위해서는 살육과 죽음도 또 간음과 간통도 마땅히 감내해어야 한다는
미드소마 속 호르가 사람들을 보며 작금의 실태를 묘하게 대구하게 된다.
<언컷젬스>의 하워드가 NBA 케빈 가넷의 경기에 의해 최후의 승패가 결판 나듯
<미드소마>의 대니에게도 최후의 승패가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5월의 여왕'이다.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열리는 미드소마에 초대된 대니가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여왕이 된 것이다.
대니는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한 크리스티안을 용서할까? 아니면 벌을 내릴까?

이 부분도 영화를 통해서 확인하기 바란다.
미드소마도 재미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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